[화씨911] 안철수에게 하는 충고, 연목구어는 사자성어만이 아니다.
안철수의 귀국설과 귀국 후 신당설이 언론에 보도된 이후 민통당 측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것 같다.
안철수 조기 귀국 및 신당 창당설은 조선일보가 먼저 터뜨렸고 이에 여타 언론들도 조선일보 보도에 초점을 맞춰 가면서 현재는 다음의 수순으로 굳어져 간다.
1. 안철수는 3월 중으로 곧 귀국한다. 2. 귀국 후 신당을 창당할 것이며 물리적으로 창당시간이 맞지 않으면 안철수 본인이 서울 노원병에 출마할 수도 있다. 3. 안철수가 출마하지 않더라도 서울 노원병에는 금태섭 조광희 정연순 중에서 출마할 것이다. 4. 부산 영도에도 유력 후보를 낼 것이다. 5. 야권은 이 때문에 다시 연대론이 불붙는 등 지각변동을 할 것이다. 등의 추정적 기사들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런 기사들에 민통당은 극도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 적나라한 예를 세계일보는 <고마운 존재였던 안철수, 이제는 ‘계륵’>이란 치졸한 제목으로 기사를 썼다. 그리고 그 기사에서 "문희상 비상대책위원장이 (안철수)신당을 두고 ‘악마의 유혹’, ‘변절’이라는 극단적인 단어로 비난했다"는 문장도 썼다.
만약 문희상이 안철수를 두고 ’악마의 유혹‘이라거나 ’변절‘이라는 단어를 쓴게 사실이라면 난 문희상에게 1995년에 김대중의 신당창당을 두고 반 김대중 정치인들이 퍼부은 김대중 비난을 되돌아보라고 권고하고 싶다. 특히 문희상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새정치국민회의 총재일 때 총재 비서실장을 지낸 인물이므로 당시 이기택계나 새정치국민회의에 참여치 않고 나중에 ’통추‘로 돌았던 이부영 김원기 제정구 등이 했던 발언까지도 한 번 되새겨보라고 하고 싶다.
나는 일전에 안철수의 정치적 성공에 대한 모티브는 김대중에게서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작금의 정치풍토에서 현존하는 정치인 중 박근혜를 제외하고는 자발적 지지청중을 단 시간에 가장 많이 모을 수 있는 인물은 안철수 외에는 없다고 보는데서 기인한다.
정치인, 특히 정치 지도자는 누가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져야 한다. 김영삼 김대중이 정치 거목으로 성장했던 토대는 반대편에 있는 독재자 박정희였다. 그리고 그들은 그 독재자에게 자신들의 안위를 위협당하면서도 꺾이지 않았다. 그 기개가 그들을 자발적 지지자가 생기게 한 원동력이다.
1970년대 신민당 40대 3인방 중 1인이었던 이철승이 김대중과 김영삼 같은 정치거목이 되지 못했던 이유가 바로 독재에 대한 저항보다 ‘정치안정’이란 이유로 독재에 암묵적 협조자 노릇을 했고, 그 협조의 대가로 야당총수 노릇을 했음이다.
혹자는 지금에도 김영삼과 김대중의 정치적 성공에는 지역주의라는 토대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틀린 말이다. 김영삼과 김대중이 박정희에 대적할 야권의 거두였을 당시 우리 정치에서 지역주의가 차지한 것은 미미하다.
물론 1971년 대선에서 박정희 측이 불리한 선거판을 뒤집기 위한 전략으로 들고 나온 이효상의 “전라도는 똘똘 뭉치는데 경상도가 뭉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대구유세 때문에 박정희에 대한 경상도 몰표 현상이 정치적으로 보면 지역주의 표심이 나타난 시초일 수 있다.
하지만 당시 선거에서 박정희의 전라도 지지율은 김대중에게 별로 뒤지지 않았다. 박정희의 경북 득표율은 75.62% 김대중의 경북 득표율은 23.32%였지만, 김대중의 전남 득표율은 62.80%였고 박정희의 전남 득표율은 34.43%였던 것에서도 그 사실은 증명된다. 즉 당시만 해도 경북의 지역주의 투표가 훨씬 강력했던 것이다.
각설하고...안철수가 김대중에게서 정치적 성공의 모티브를 찾아야 한다고 한 이유는 그럼 뭔가? 이는 앞서 거론했듯이 안철수만이 현존하는 정치인 중 자발적 지지자를 정치세력으로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장외인사이기 때문이다.
김대중...성공한 정치인인가? 결과는 그렇다. 하지만 김대중은 성공이라는 결과물을 얻을 때까지 했던 실패의 과정은 지난하다 못해 험난했다. 독재자의 압제를 받았던 시기는 제외하자. 그 스스로 독재자의 압제 때문에 국민과 역사로부터 받았던 상급을 1987년 후보단일화 실패의 책임을 둘러쓰므로 온전히 반납했기 때문이다.
당시의 단일화 실패가 김대중의 절대적 잘못이 아니었음에도 김대중은 스스로 실패의 책임을 둘러쓰고 솔직하게 사과했다. 그랬음에도 전혀 사과하지 않고 당당하다가 끝내 김대중에 대한 승리라는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김영삼이 독재자들과 야합하기 전까지 김영삼은 국민과 역사에게 전혀 돌팔매를 맞지 않았다.
김영삼이 순전히 김대중을 이기기 위해 독재자들과 야합한 뒤에야 김영삼의 권력욕이 단일화의 실패를 불렀음이 현실화되었으나 지금도 1987년 단일화 실패에 대한 책임은 김대중이 더 많이 지고 있다. 나는 이것을 언필칭 주류 역사가들, 주류 운동가들, 주류 오피니언들의 반 김대중, 반 호남성향, 즉 영남패권주의에 물든 때문으로 보고 있다.
내가 알기론 나의 이런 인식에 동의하는 정치학자 중 강준만, 김욱 등이 있다. 물론 한상진, 황태연 등이 친 김대중 정치학자들이긴 하지만 이들은 강준만이나 김욱과 같이 정면으로 영남패권주의 정치역사관을 비토한 적은 내가 알기론 없다.
다시 각설하고...김대중은 단일화 실패 후 야당의 정치지도자로 남았으나 김영삼은 여당으로 변신 대통령이 된다. 김영삼은 자신의 정치적 목적인 김대중 이기기에 성공한 것이다. 여기까지 보면 김대중은 실패자다. 따라서 1992년 실패자 김대중이 5년 후 성공한 김대중이 된 과정이 바로 안철수가 정치지도자로 성공하기 위한 모티브를 삼아야 할 과정이다.
그럼 1992년 12월 18일 이후 김대중의 길을 더듬어야 한다.
14대 대통령 선거 개표가 끝난 다음 날, 김대중은 눈물을 흘리며 정계은퇴를 선언한다. 그리고 그의 행선지는 영국이었다. 안철수는 2012년 12월 19일 선거결과가 발표되기 전에 홀연히 미국으로 출국한다. 1993년 한반도는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2013년 한반도도 전운이 감돌고 있다. 1993년 당시 북한은 NPT를 탈퇴하므로 핵 위기를 고조시켰다. 2012년 북한은 3차 핵실험을 강행, 한반도의 핵 위기를 1993년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고조시키고 있다.
김대중은 북한이 핵무장을 두고 미국과 첨예하게 대치하면서 위기를 한창 고조시키던 1993년 7월, 6개월여의 영국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한다. 안철수가 3월에 귀국한다면 북한의 핵실험에 대한 유엔의 제제방안이 나올 수도 있는 시기다. 북은 유엔이 다시 자신들을 제제한다면 추가핵실험도 불사하고 그보다 더한 도발도 감행할 기세다.
당시 김대중은 무슨 생각으로 귀국했을까? 그의 생각은 귀국 후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아태재단) 설립으로 나타난다. 평화재단 설립 시까지만 해도 김대중의 스텐스는 정계은퇴를 번복하지도 않았으므로 정치 불개입, 즉 정치와는 불가근불가원이었다. 하지만 안철수는 다르다. 그는 대선에 출마하겠다는 선언을 하면서 대선에 실패하더라도 정치를 그만두지 않겠다고 선언한 상태다. 미국에서 들려오는 소리도 귀국 후 그의 스텐스는 정치인이다.
그랬던 김대중은 귀국한지 2년 후인 1995년 전격적으로 정계복귀를 선언한다. 그의 정계복귀는 물론 그 스스로 선택한 사실이지만 여건은 당시 야당인 통합민주당과 그 당의 당수인 이기택, 그리고 이기택계 당권파 주류들이 만들어 주었다. 정계복귀를 선언할 필요도 없이 귀국하면 당연히 정치인인 안철수의 정치적 터전이 마련될 소지를 제공하고 있는 상대는 현 야당인 민주통합당과 그 당의 당권파인 친노계다.
김대중은 당시 정계복귀를 선언하기 전 야당인 민주당에게 어떤 식이든지 1995년에 처음 실시되는 전국 지방선거의 승리를 주문한다. 이는 자신이 20여 일의 단식을 통해 얻어낸 지방자치제가 처음으로 전국 자치단체장을 뽑는 선거를 통해 시행되는 역사적인 시기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시 민주당 이기택 대표와 당권파는 김대중의 지방선거 관심이 싫었다. 그가 지방선거를 빌미로 민주당을 접수하지나 않을까하는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 것이다. 현 민통당은 안철수의 4월 보궐선거나 10월 보선, 그리고 내년 6월 지방선거 관심이 싫다. 안철수의 등장으로 자신들의 터전을 안철수에게 빼앗길 것 같은 조바심이다.
당시 김대중은 이기택의 민주당에게 노골적으로 지역등권론을 주장했다. 그의 지역등권론이란 이미 현실로 안착되어 있는 지역주의 투표를 인위적으로 깰 수 없다면 야권이 우세한 지역의 철저한 승리를 통해 여당의 힘을 빼야한다는 논리였다.
이 논리로 호남과 수도권을 민주당이 먹고 충청권은 자민련이 먹으면 여당인 민자당은 확실한 영남당으로 축소시킬 수 있다는 정치공학적 계산이었다. 하여 은밀하게 서울시장 후보는 이회창, 조순, 고건 중에서 영입하여 출진시키고 경기는 이종찬 등 정치권 거물을 영입 승부를 걸 계산을 했다.
그런데 이회창은 ‘총리를 지낸 사람이 서울시장에 나가겠는가?’라는 거절로 영입에 실패했고, 고건은 선거승리가 장담되지 않으므로 선뜻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그리고 조순이 영입에 응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김대중과 이기택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다.
김대중의 이 같은 훈수가 이기택은 자신의 권력에 도전하는 것으로 받아들여 지므로 경기지사 후보로 자신이 미는 장경우 카드를 고집, 관철시켰다. 때문에 인천은 김대중과 이기택 간에 줄다리기도 못했다. 결국 김대중의 계산에 따랐던 조순만 이기고 경기도도 인천도 민자당 후보에게 패했다. 김대중이 꿈꿨던 민자당=영남당 계산이 틀어진 것이다.
김대중의 정계복귀 선언은 이런 바탕위에서 나온 결과물이다. 지방선거 공천과정에서 민주당과 이기택계에게 실망한 김대중은 전격적으로 정계복귀를 선언하고 두달 후인 9월 5일, 새정치국민회의라는 정당을 창당, 총재로 취임하면서 정계에 복귀한다. 이때 민주당에서 새정치국민회의로 합세한 현역은 65명이었다. 그리고 탈당하면 의원직을 잃는 동교동계 비례대표는 당적은 민주당이어도 정치는 새정치국민회의와 함께했다.
김대중의 대권4수 성공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의 정계복귀 당시 언론은 우군이라곤 없었다. 언론만이 아니었다. 재야인사들, 정치평론가, 심지어 시중의 장삼이사들도 김대중을 ‘대통령병 환자’라고 지칭했다. 생각건대 당시 유시민의 김대중 비판은 지금 입에 담기도 싫다. 그러나 김대중은 이런 비판을 모두 감수하고 대통령직 하나만 보고 전진했다.
이강래, 황태연, 나종일, 이영작, 그리고 김홍일의 처남인 윤홍렬과 김홍업이 운영하던 정치기획사 밝은세상...또 알려지지 않았던 김대중의 대선준비팀인 동북아 포럼, 이들은 DJP연합의 주창자들이거니와 ‘준비된 대통령’ 구호로 선거 홍보전을 승리로 이끈 주역들이다. 여기에 섶을 지고 불 속에라도 뛰어들 수 있는 동교동계 ‘돌쇠들’, 김대중이란 이름으로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던 79명의 국회의원들까지....많은 사람들이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만든 공신들이나 특별히 나는 이들이 생각난다.
이들이 세운 대권전략의 대강은 여당 분열과 야당은 대연합의 선거구도 형성이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영남역포위 전략으로 나온 것이 DJP연합이었다. 하여 끝까지 김대중계로 흡인되지 않은 민주당 이기택계는 버리는 대신 노무현과 김정길을 영입했다. 그 외에도 야권 대연합이란 논리로 재야의 명망가들을 영입하고 김종필과 연합을 성사시키는 화룡정점도 완성했다. 따라서 JP 쪽의 보수색채 차용으로 색깔론 시비를 차단했으며 보수층의 정권교체에 대한 불안심리도 해소시켰다.
여기까지다. 시기, 대외여건(북핵위기), 야당 상태(친노의 자기밥그릇 챙기기와 이기택계의 자기밥그릇 챙기기는 매우 유사하다), 여당의 무능(현 박근혜 대통령의 용인술 하나만으로도 그 답은 된다), 김대중은 특정지역의 강고한 지지층이나 안철수는 젊은 연령층의 강고한 지지층, 이보다 더 유사할 순 없다.
그렇다면 안철수에게 필요한 것은 안철수 본인의 의지와 또 다른 이강래, 황태연, 나종일, 이영작, 윤홍렬, 밝은세상, 동북아포럼이다. 즉 치밀한 계산과 제대로 된 정치기획을 할 사람, 그리고 여론동향 파악과 대응에 능한 조직이란 얘기다.
이로 보면 거론된 개인들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박선숙 송호창 김호기 금태섭 조광희 정연순 등은 사실상 앞서 거론한 김대중 대통령 만들기 공신들에 급이 한참 못 미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안철수가 대권에 뜻을 두고 있다면 이의 해소가 가장 급선무다.
빨리 먹는 밥은 체한다. 준비된 대통령은 그냥 나온 말이 아니다. 최소한 내가 거론한 이 정도의 준비가 완성되었을 때 귀국하여 신당을 하라. 그래야 파괴력이 생겨 민통당의 의원들이 흡인될 수 있다. 최소한 김대중의 ‘지역등권론’에라도 버금가는 논리적 귀결점을 만들어서 그에 따른 조직과 그에 따른 대중흡인력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연목구어’는 사자성어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